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콘스탄티누스 I 동상, Capitoline 박물관, 로마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교회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될 주요 사건 중 하나다. 니케아 공의회는 313년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1)된 후 황제에 의해 소집된 세계적 규모의 종교회의다. 회의 장소는 소아시아 비티니아의 니케아(현 터키의 이즈니크).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1차 회의는 325년, 2차 회의2)는 787년에 열렸다. 회의의 목적은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16세기 프레스코화

유월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다. 사상 첫 공의회였던 1차 회의는 325년 5~6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해 황제의 별궁에서 열렸다. 당시 황제는 제국 내의 동·서방 교회 주교 약 1,800명을 초대했고, 250~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동·서방 교회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일시켜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주요 의제로는 동·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두 가지 문제가 상정되었다.

하나는 ‘파스카 논쟁’이다.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이미 유월절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이 니산월 14일 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성찬식 행하는 날을 한 날로 통일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아리우스 논쟁’이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예수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는 격렬한 논란을 일으켜왔다.

2개월간의 회의를 통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방 교회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기로 결의했다. 부활절 날짜는 서방 교회에서 주장해오던 대로 ‘춘분 후 만월(보름) 후에 오는 첫 일요일’로 변경했다. 매년 달의 운행에 따라 날짜를 산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유월절과 무교절을 폐지시켜버렸기 때문에 성경에 정해진 부활절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성 빅토르 교황(189~199년 재임) 때, 예수 부활 축일을 소아시아 각 지역 교회에서는 유다인의 빠스카, 즉 니산달 14일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로마에서는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냈었다. 지금처럼 부활 축일을,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 주일에 지내게 된 것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다음의 일이다.”3)

또 다른 쟁점 사안이었던 아리우스 논쟁은 아리우스를 정식으로 파문하고 유배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때 정립한 ‘니케아 신경(니케아 신조, Symbloum Nicaenum)’은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질이라는 ‘삼위일체’ 신앙을 담고 있다.4)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은 ‘십사일파(十四日派, Quartodecimanism)’라고 불리며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월절과 부활절은 같은 날처럼 취급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최대 축제일인 유월절을 생소하게 여기는 아이러니를 낳은 건 이 때문이다.


2)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 당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을 섭정하던 황후 이레네 2세가 소집했다. 니케아에서는 두 번째 열린 회의였지만 공의회로서는 7차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 파괴를 금지하고 성화상을 숭배하는 전통을 복원하기로 결의했다.
3)
교부들의 신앙, 제임스 C. 기본스, 가톨릭출판사, P. 139, ISBN 9788932103082
4)
‘니케아 신조’,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