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논쟁 - 동서방 교회의 유월절 날짜 논쟁
파스카 논쟁 개요
‘파스카 논쟁(Paschal Controversies)’은 유월절 성찬 날짜를 놓고 2~3세기경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에 벌인 논쟁을 말한다.1) ‘파스카 논쟁’에 대해 역사가들은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3) 그래서 이 논쟁을 ‘부활절 논쟁(復活節論爭)’이라고도 한다.
파스카 논쟁 오류
‘파스카 논쟁’ 사건에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사적 오류다. 파스카 논쟁의 쟁점은 ‘부활절’이 아니라 ‘유월절’이었다. ‘파스카(πασχα)’는 ‘유월절’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다. 부활절로 오용되고 있는 프랑스어 Pâques, 스페인어 Pascua, 라틴어 Pascha는 모두 ‘유월절’을 뜻하는 헬라어 파스카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는 부활절을 중시했던 서방 교회의 입장에 편중된 표현이다.
4세기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의 기록을 보면 이 사건의 발단이 유월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 “이 무렵 유월절을 지키는 일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므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다. 보다 옛 전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아시아의 교회에서는 정월 14일을 주님의 유월절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유대인들에게 유월절 양을 잡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날이다.”
두 번째는 성경적 오류다. 부활절 날짜는 이미 토라(Torah)5) 에 명시되어 있다. 그 날짜를 다시 정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신약시대 부활절의 기원이 되는 초실절 날짜는 ‘무교절 후 안식일 다음 날’, 즉 무교절 후 첫 일요일이다.6)
파스카 논쟁의 발단
파스카 논쟁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두 순교하거나 죽은 이후에 시작됐다. 7) 기독교의 초석이 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일련의 격변을 거친 후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기독교는 소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물론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에 형성돼 있었다.8)
로마 제국 내에는 다양한 신화와 종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 미트라교도 로마인들에게 환영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로마교회는 이교도의 사상을 받아들였다.9) 박해를 피하기 위한 제국과의 타협,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효과적인 선교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였다.
2세기 로마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전통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교도들이 춘분 즈음에 지키고 있던 봄 축제일을 부활절과 접목시킨 일이었다. 로마교회는 유월절과 부활절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월절은 예수의 죽음을, 부활절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월절에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며 그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을 행했고, 부활절에는 떡을 떼며 예수의 부활을 기념했다.10) 그러나 로마교회는 유월절은 생략하고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예수와 사도들의 전승대로 유대 종교력 니산월(Nisan, 1월) 14일에 성찬식을 행했다. 신약성경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나누었다.11) 그리고 다음 날(무교절) 십자가에 희생당한 후 돌아온 일요일(초실절)에 부활했다.12) 이는 부활절의 기원이 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불일치는 소아시아와 로마를 오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초래했다. 소아시아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난 후 로마 지역으로 갔을 때, 그제야 성찬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1차 파스카 논쟁
A.D. 155년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카르포스(Polycarpos)는 로마를 방문해 로마교회의 감독(오늘날의 교황)이었던 아니케투스(Anicetus)와 유월절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카르포스는 “나는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 그리고 여러 사도들과 함께 매년 유월절을 지켜왔다”며 예수와 사도들의 전승대로 니산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설복시킬 수 없어 각자 전임 감독들의 관습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이 일에 대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후에 벌어진 ‘제2차 파스카 논쟁’ 때 로마교회의 감독 빅토르 1세(VictorⅠ)에게 고올(Gaul) 지역 감독이었던 이레나이우스(Irenaeus)가 중재 차원에서 보낸 서신을 인용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니케투스가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폴리카르포스가 로마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의견의 차이가 있었으나 곧 서로 화해했으며, 이 주제로 서로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포스에게 그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권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폴리카르포스는 주의 제자 요한, 그리고 그와 교제한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그것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폴리카르포스도 아니케투스에게 그 관습을 지키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니케투스는 전임 감독들의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3)
이후에도 유월절 성찬 날짜 논쟁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사데교회의 감독 멜리토(Melito)는 168년경 라오디게아에서 유월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니산월 14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지지했던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저서 『유월절에 관하여(Peri Pascha)』에는 예수께서 새로운 예법의 유월절을 세워주셨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니산월 14일 준수와 유대교의 유월절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14)
제2차 파스카 논쟁
로마교회는 제국의 중심에 세워진 교회답게 서방의 우두머리 교회로서 영향력이 점점 막강해졌다. 파스카 논쟁은 A.D. 197년경 로마교회 감독 빅토르 1세가 모든 교회에게 유월절을 지키지 말고 부활절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다시 점화되었다.
서방 교회들은 빅토르 1세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그리스도교의 초기 기반이었던 동방 교회들은 크게 반발했다. 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거부의 뜻을 밝히며 자신의 입장을 편지에 담아 빅토르 1세에게 보냈다.15)
“우리는 진정 올바르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감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인 빌립과 늙도록 처녀로 지냈던 그의 두 딸은 히에라폴리스에 잠들어 있습니다. 역시 성령의 감화 아래 살던 또 한 명의 딸은 에베소에 잠들어 있습니다. 또 우리 주님의 가슴에 기댔으며 사제로서 제사장의 명패를 달고 있었으며 교사였고 순교자였던 요한도 에베소에 묻혀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모두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신앙의 규칙을 따르면서 복음에 따라 14일을 유월절16)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 폴리크라테스는 비록 당신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일곱 명의 전임 감독들이 있고, 나는 8대 감독입니다. 전임 감독들은 항상 백성(유대인)들이 누룩을 없앤 날(유월절)을 지켜왔습니다. … 나는 나를 협박하기 위해 취해지는 일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들이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7)
폴리크라테스는 에베소교회의 8대 감독으로서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빅토르 1세는 자신의 명령에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고 폴리크라테스와 동조한 모든 교회들을 비정통으로 간주하고 즉시 파문을 통보했다.18)
그것이 모든 교회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었다. 로마교회의 관습을 지키는 감독들이 중재에 나섰다. 앞서 언급한 고올교회 감독 이레나이우스(Irenaeus)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고올 지방 형제들의 이름으로 하나의 서신을 썼는데 … 빅톨에게 전승으로 전해진 관습을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축출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19)
아이러니하게도 파스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자는, 뜻밖에도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로마의 황제 -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the Great)였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논쟁을 종결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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